2023. 11. 17. 19:42ㆍ일본여행
다시 오래간만에 일본에 오고 맞은 첫 주말.
도쿄에서 가려고 했던 곳을 생각해봤는데 딱히 없었다. 솔직히 내가 생각하기에는 도쿄에 그렇게 볼 게 많은 건 아닌 거 같다.
자신만의 특별한 취미라고 해야하나 그런 게 있으면 갈데가 많긴 한데
나는 딱히 그런 건 아니었고 맨처음 왔을 때 코로나로 난리여서 그것 때문에 쫄아서 별로 밖을 안나갔었다.
그래서 딱히 도쿄에서 취미활동을 하는 건 없었고, 코로나가 풀리면서 도쿄에서 유명 스팟은 대충 돌아봐서 도쿄에 딱히 갈 곳이 없었다고 하는 게 맞을 거 같다.
아무튼 그러던 중에 갑자기 생각난 게 도쿄에 김옥균 묘가 있다는 것이었다. 도쿄 한복판에 있는 아오야마 영원의 외국인 묘지에 김옥균의 묘비가 있다.
묘비만 있고, 유해가 묻혀있지는 않은 걸로 알고 있다. 김옥균이 죽고 일본인 지인들이 김옥균의 몸의 일부를 갖고 일본으로 가져가서 묻었는데
한일 합병이 되고 나중에 김옥균의 양아들이 충남 아산(맞나?)의 군수로 임명돼서 그 유해를 일본에서 가져와서 다시 묻어줬다고 알고 있다.
김옥균 등이 주도한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났고, 당시 일본군이 청군을 아직까지는 못 이길 거라 생각했는 지 일본 쪽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아서 실패했다.
그 후 김옥균은 일본으로 도주했고, 일본에서 갑신정변(1884) 때는 잘 안도와주더니 김옥균이 오니까 여기저기서 접근해온 세력이 있었다.
뭐 사실 접근해온 쪽은 다 당시 메이지 정부와 사이가 좋지 않던 쪽이었고
자유당이라는 좌파세력 쪽에서 조선에 자객을 몇 보내서 봉기를 시키면 조선 각지에서 호응이 일어날 거라는 말도 안되는 계획을 김옥균과 얘기도 안하고 독자적으로 세웠고
그 목적으로 돈을 모은다는 명분으로 자유당 쪽이 오사카 지역에서 무기를 들고 도둑질을 했었다. 그게 1885년 12월에 일어난 오사카 사건이라는 것이었다.
별 일이 아니고 그냥 소동이 일어난 건데 그 소식을 듣자 당시 조선 정부에서는 김옥균이 또 반란을 일으킬 거라고 해석을 하면서 일본 정부에 당장 김옥균을 조선으로 보내라고 했다.
일본 쪽에서는 그래도 망명한 사람인데 보낼 수는 없다고 했고, 고종의 국정 과제의 하나가 김옥균을 죽이는 게 됐다.
그 후에 고종이 장은규, 지운영(지석영의 형) 등을 보내 암살을 시도하나 실패하고 암살 지령을 적은 서류도 빼앗기게 된다. 그걸 보고 김옥균이 고종을 디스하니까 고종은 더 빡쳤다.
그나마 일본이 조선의 요청을 일부 받아들여서 김옥균을 태평양 쪽에 있는 오가사와라 섬에 몇 년 유배보내고 그 다음에 홋카이도 지역에도 유배 개념으로 보냈었는데
그 후에 다시 오사카 지역으로 돌아왔었다고 한다.
원래는 제 3국에 보내려고 했고 박영효 같은 사람도 같이 미국 가실? 미국으로 ㄱㄱ 했는데 김옥균도 거기까지 였는지 일본에 있기로 했다.
김옥균은 거기서 게이샤(기생) 같은 여자 사이에서 애도 낳았다고 하니 갑신정변 때의 야심은 잃어버린 거 같아 보인다.
한편, 고종의 계획은 아직 진행 중이었고, 상인인 이일식을 일본으로 보내서 김옥균과 친하게 지내게 하면서 장기적으로 의심을 풀게 하였고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자 프랑스 사교계에서 꽤 인싸로 알려진 홍종우를 통해 김옥균을 상하이로 오게 꼬드긴다.
자기가 죽을 자리로 간다는 생각도 없이 상하이에 간 김옥균은 가자마자 홍종우 등에 암살당하고 고종은 원세개 등에게 연락해서 암살자들을 처벌하지 못하게 하도록 했고 김옥균의 시체를 배로 싣고 오게 한다.
그 때 당시에 암살에 든 비용이 조선 정부의 연간 예산에 맞먹는다는 얘기가 있었던 거 같다. 괜히 나라가 망한 게 아니다.
그 후에 김옥균의 시체는 부관참시 됐고, 이게 일본에도 알려지면서 여론몰이에도 이용됐다. 대역부도옥균이라는 글씨와 시체가 사진으로도 남아있다.
사실 김옥균이 상하이에 갈 때 일본에서도 어느 정도 방관한 게 있는데 죽으니까 여론 몰이에 이용됐다.
그리고, 일본 내의 반청, 반조선 여론은 사실 정부보다 국민이나 언론이 더 강했었는데 언론 입장에서는 전쟁이 나면 언론의 역할이 늘어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던 거 같았다.
아무튼 그렇게 생을 마감했고, 갑오개혁 이후에 잠깐 복권됐다가 아관파천 이후에 다시 격하됐다가 다시 일제시대에 오니까 복권됐다고 알고 있다.
아오야마 영원의 비문을 박영효가 썼다고 한다. 너무 길고 한자가 잘 안보여서 패스했다.
부디 이번에는 제 2의 김옥균 같은 죽음이 나오지 않길 바란다.
김옥균 묘비를 보고 다음에 미술관도 있어서 잠깐 안에서 무료 전시도 보고 왔다.
그리고 저녁 먹고 돌아가는 길에 마침 일본유신회의 요시무라 히로후미(吉村洋文)의 연설이 있다고 해서 한 번 보러 갔다.
이 때가 4월달 통일지방선거 후반전의 도쿄 23구 내의 의회 선거가 있었을 때였다.
요시무라는 인구 약 900만 명인 오사카 부의 지사를 재선 중인 사람으로 처음에는 중의원에서 오사카 4구 지역에 출마해서 낙선했지만 석패율 제도로 비례대표로 당선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당시 오사카 시장인 하시모토 토오루(橋下徹)가 오사카 도 구상 투표(오사카 시 행정구역 폐지 후 오사카 부를 오사카 도로 승격시키고, 오사카 시에 속한 구들을 4개의 특별구로 편성하는 안)가 부결되자 선거에 드는 비용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오른쪽이 요시무라 히로후미)
그리고 그 빈자리를 담당하기 위해서 요시무라가 의원직을 사퇴하고 오사카 시장 선거에 출마하고 당선된다.
4년 오사카 시장 임기를 지내고 당시 오사카 부지사이자 일본유신회 대표인 마쓰이 이치로(松井一郎)와 교대해서 마쓰이 이치로가 오사카 시장을 하고 2차 오사카 도구상 투표를 진행한다.
요시무라는 오사카 부지사 선거에 출마해서 2019년부터 지금까지 오사카 부지사를 하고 있다.
일본유신회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가 있는 사람이다.
장소는 도쿄도 23구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오타구(大田区) 카마타(蒲田) 역 앞이었다.
이 선거가 있을 시기에 와카야마 1선거구에서 중의원 보궐선거가 있어서 기시다가 와카야마에 갔는데 테러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제 3당인 일본유신회의 연설에서도 경계가 꽤 삼엄했다. 경찰이 꽤 있었다.
역 앞에서 보는 일부 사람들과 연설을 보라고 동그랗게 쳐 놓은 라인에 들어가서 있는 사람들을 합해서 약 500명 정도는 돼보였다.
오사카가 본거지이지만 도쿄에서도 꽤 인기가 있는 듯했다. 또, 요시무라의 아줌마 팬들이 은근히 있다. 하시모토나 마쓰이는 외모로 어필이 안되는 정치인이었지만 요시무라는 조금 다른 거 같다.
일본유신회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 내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어필이 잘 되는 정치인인 거 같다. 연설을 호소력있게 잘 한다.
대표적으로 아이들에게 짊어지게 해야하는 건 빚이 아니라 란도셀입니다. 라는 멘트가 있다.
이 때 요시무라가 응원 연설을 했던 오타구 구의회 후보 4명은 전원 당선되었다. 선거에 굉장히 강한 일본유신회가 다음 선거에서는 큰 일을 낼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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